김지하 - 둥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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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at 2006-09-29 0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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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아이들 공놀이에 갑자기 뛰어들어

손으로 마구 공 주무르는 건

철부지여서가 아니야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골동상 유리창 느닷없이 깨뜨리고

옛 항아리 미친듯 쓰다듬는 건

훔치려는 게 아니야

이것 봐, 자넨 몰라서 그래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노점상 좌판 위에 수북수북이 쌓아놓은

사과알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건

아니야

먹고 싶어서가 아니야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모난 것, 모난 것에만 싸여 살아

둥근 데 허천이 난 내 눈에 그저

둥글기 때문



거리에서

좁은 바지 차림 아가씨

뒷모습에 불현듯 걸음 바빠지는 건

맵씨 좋아서가 아니야

천만의 말씀

색골이어서는 더욱 절대 아니야

둥글기 때문





불룩한 젖가슴 도톰한 입술

새빨간 젖꼭지나 새빨간 연지

그 때문도 아니야

뚫어져라 끝내 마주 쳐다보는 건

모두 다 그건

딱딱한 데, 뾰족한 데 얻어맞고 찔려 산 내게

환장하게 보드랍고 미치고 초치게

둥글기 때문

개 같은 이 세상에 아직 살아남아

내 이렇게 허덕이는 건 허덕이고 있는 건

다른 뜻 있어 아니야

굳이 대라면 허허허

지구가 워낙 둥글기 때문



그리고 또 하나

요사이붂쩍 절을 자주 찾는 건

믿어서도 깨쳐서도 아니고 오직 한 가지

부처님 미소가 사뭇사뭇 너그럽고

둥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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