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년 전 한 아버지의 손짓: 세 종교의 뿌리와 갈등의 역사 -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스마엘, 이삭)을 통해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역사가 시작 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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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천년 전 한 새벽, 아브라함의 결정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 한 아버지의 중요한 결정이 있었습니다. 그의 단 한 번의 손짓은 오늘날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라는 세 주요 종교와 43억 명에 달하는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광야로 보낸 아들은 이스마엘이며, 천막에 남은 아들은 이삭입니다. 오늘날 지구에 사는 두 명 중 한 명은 이 두 아들 중 한 명을 자신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한 손짓은 수천 년 뒤 한 회당의 문을 잠그게 했고, 최근 가자 지구의 참상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역사의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같은 아버지, 같은 신,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는 4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화해하지 못하고 갈라져 있습니다. 왜 한 뿌리에서 시작된 형제들이 셋으로 나뉘어 한 번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것일까요?
2. 우르의 한 천막: 사라의 선택과 함무라비 법전약 4천 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우르 외곽의 한 천막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천막 안에는 이집트 출신의 여종 하갈도 함께 있었습니다. 사라는 매일 광야를 바라보며 그 시대 여자에게 가장 무거운 염원, 바로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없다는 것은 가문이 끊기고 남편의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라가 하갈에게 "내 여종에게 들어가십시오"라고 말하며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보내는 행위는 오늘날에는 차갑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매우 일상적인 결혼 풍습이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제146조에는 "결혼 2년 안에 임신이 안 되면 여종을 통해 후사를 둔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고대 결혼 계약서에도 같은 조항이 발견됩니다. 사라의 결정은 그 시대 법이 인정한 가장 정상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적이고 정상적인 결정 하나가 4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거대한 강물의 첫 물방울이 됩니다.
하갈은 결국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86세에 처음으로 자신의 핏줄인 아들을 안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4년이 더 흐른 후,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기적처럼 그녀에게도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의 친아들 이삭입니다. 이로써 천막 안에는 갑자기 두 명의 어머니와 두 명의 아들이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3. 광야의 하갈: 신에게 이름을 붙인 유일한 인물어느 날 새벽, 두 아이가 함께 노는 모습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아이는 내 아들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두 아들 모두 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는 14년을 자기 무릎 위에서 자란 첫째였고, 다른 아이는 노년에 얻은 약속의 둘째였습니다.
새벽이 밝기 전, 아브라함은 빵 한 덩어리와 물 한 가죽 부대를 들고 하갈을 깨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갈의 손에 쥐여주고 광야 쪽을 가리켰습니다. 이 한 손짓으로 한 가족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한 아이는 천막에 남았고, 다른 아이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죽음과 직결된 광야로 떠났습니다. 부족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생존을 포기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하갈의 등 뒤에서 천막의 등불 한 점이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손에는 물 한 가죽 부대뿐, 등에는 아이가 업혀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만나야 할지도 모른 채 광야를 걷던 하갈의 물이 떨어졌습니다. 하갈은 아이를 나무 그늘 아래 눕히고,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화살이 닿을 만한 거리쯤에 가서 앉아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바로 그때, 광야 한가운데서 하갈은 신의 사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성서 전체를 통틀어 신의 사자를 처음 만난 사람이 하갈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그 자리에서 한 가지 더 놀라운 일을 하는데, 바로 신에게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엘 로이(El Roi), "나를 보시는 신". 성서 전체에서 신에게 직접 이름을 붙인 사람은 하갈 한 명뿐입니다. 광야로 쫓겨난 한 여종이 그 광야에서 신의 첫 손님이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한 가족 안의 유산 상속 다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같은 아버지의 두 아들 중 누가 정통 후계자인가 하는 질문에서 4천 년의 역사가 갈라져 나갑니다. 광야의 아이 이스마엘은 살아남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사막을 건넙니다. 그는 사막에서 자라 활을 잘 쏘는 사냥꾼이 되었고, 그의 후손은 아라비아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갑니다. 이들이 아랍인과 무슬림의 조상이 됩니다. 천막에 남은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됩니다. 한 새벽의 한 손짓으로 두 갈래가 양쪽으로 흘러가 오늘날 지구에 사는 두 명 중 한 명이 이 두 아들 중 한 명을 자기 조상으로 부르게 됩니다. 유대인은 이삭의 혈통 후손이며, 아랍 무슬림은 이스마엘의 혈통 후손입니다. 기독교인은 혈통은 다르지만 이삭의 줄기를 자기 영적 뿌리로 받아들입니다. 이들을 합쳐 약 43억 명의 신앙이 그 새벽 천막 입구의 한 동작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새벽 자기가 무엇을 시작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 손짓 한 번이 3천 년 뒤 한 도시의 한 바위 위에서 다시 마주칠 줄은요.
4. 예수와 바울: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갈라진 첫 줄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삭 쪽으로 한 갈래, 이스마엘 쪽으로 한 갈래, 그렇게 천천히 갈라져 갔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세 종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참 동안은 유대교 한 갈래뿐이었고, 같은 신, 같은 조상, 같은 경전을 공유하며 한 가족이 한 식탁에 앉아 있는 시기가 길었습니다. 그 식탁에서 첫 번째 갈림이 갈라져 나옵니다. 한 유대인 청년 예수가 등장합니다.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처음에 기독교는 유대교 안의 한 분파, 한식구 안의 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고 머지않아 바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시대 유대교에 들어오려면 남자는 할례, 즉 자기 몸에 신과의 약속을 새기는 의식을 받아야 했고, 모세가 받았던 복잡한 음식 및 생활 규정도 지켜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조건을 없애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즉,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한식구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 결정 한 번에 기독교는 한 민족의 종교에서 모두의 종교로 넘어갑니다. 오늘날로 치면 본사 약관이 있던 회원가에 새 약관 하나로 누구나 회원이 되도록 문을 연 셈입니다. 회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본사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오랜 세월 지켜온 약관을 너희가 지우는 거냐?"는 마찰이 시작됩니다. 이 마찰이 두 종교가 갈라지는 첫 줄이 됩니다.
5. AD 70 성전 파괴와 통곡의 벽그 마찰이 심해지던 중 한 사건이 터집니다. 기원 후 70년 8월,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도시 한가운데 서 있던 제2성전을 무너뜨립니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은 단순한 수도가 아니었습니다. 4천 년 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신에게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이 바로 이 도시의 한가운데 솟은 산입니다. 그 산 위에 다윗 왕이 도시를 세웠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첫 성전을 지었습니다. 성전 가장 깊은 곳에는 지성소라는 방이 있었는데,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신이 자기 백성과 만나기로 약속한 그 방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그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신과 만날 길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외벽 일부가 지금 우리가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그 벽입니다. 한 신전의 한 면, 그것 하나만 남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날부터 자기 땅을 잃고 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를 겪게 됩니다. 그 외벽 하나를 다시 손에 쥐기까지 그들은 70세대, 약 2천 년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 후 250년이 더 지나갑니다. 그동안 기독교는 박해받는 소수 종파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인정한 합법 종교로 올라섭니다.
6. 325년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친서의 낙인기원 후 325년 5월, 지금의 터키 땅 니케아라는 도시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기독교 공의회가 열립니다. 그 자리에서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데, 부활절을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은 날 지내지 말 것, 그리고 일요일 예배를 강화할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친서를 보내며 "저 가증스러운 유대인들과 우리는 아무것도 공유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습니다.
이는 한 신앙이 한 황제의 정치 권력과 만나는 첫 순간이었습니다. 신학적 차이가 종교 내 토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친서 한 장으로 한 민족 전체에 잔인한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신앙이 정치 권력과 만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4세기 한 황제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보여준 한 줄이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에 또 다른 한 줄이 그어집니다. 신학적으로 갈라진 것은 이해하지만, 생각이 다르다고 반드시 칼을 드는 것은 아니었기에, 두 종교 사이에는 약 300년의 평화로운 시간이 흐릅니다.
7. 무함마드와 메디나 헌장: 한 도시의 짧은 공존이 시기, 아브라함의 또 다른 후손의 줄기에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무함마드입니다. 그 시대 메카는 카바 신전 안에 360개의 신상을 모신 다신교 도시였고, 매년 순례자들이 몰려와 메카 상인들에게 큰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런 메카에서 40세의 무함마드가 "신은 오직 한 분뿐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메카의 지배 부족인 쿠라이시족은 신상이 무너지면 순례가 끊기고 메카의 부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무함마드에 대한 박해를 시작합니다.
622년, 무함마드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메카를 떠나 아라비아반도,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라는 도시에 도착합니다. 그 도시 안에는 이미 유대인 부족 셋이 살고 있었습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 헌장을 만드는데, 이는 무슬림과 유대인을 "한 공동체, 한 움마"로 묶는 역사적인 문서였습니다. 부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한 헌장 안에 묶은 인류 사료 가운데 가장 이른 사례 중 하나입니다. 7세기 메디나에서는 무스크와 회당이 한 골목에 같이 서 있고, 무슬림과 유대인이 같은 우물에서 물을 깃고, 도시가 공격당하면 같이 성벽 위에 올라가 같이 화살을 맞았습니다. 한때 그것이 가능했던 도시가 바로 메디나였습니다. 그 시기 무슬림이 기도하던 첫 방향, 첫 키블라도 메카가 아니라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두 해 뒤 624년에야 그 방향이 메카로 바뀝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슬람은 그 후 500년 동안 문명의 중심이 됩니다.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유럽이 중세 암흑기에 갇혀 있을 때, 이슬람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훗날 유럽 르네상스의 토대를 만듭니다. 그 시기 한 도시, 한 도서관에서는 무슬림과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같이 책을 번역하던 짧은 시기도 있었습니다. 4천 년의 새벽이 갈라놓은 형제들이 한 식탁에 다시 앉았던 짧은 500년이었습니다.
8. 예루살렘 0.9km²: 한 바위 두 신앙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한 곳, 예루살렘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예루살렘의 면적은 여의도의 약 100분의 1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 작은 자리에 통곡의 벽과 성묘 교회, 그리고 바위 돔 사원이 같이 얹혀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도시 한가운데 솟은 한 바위 위에 유대 지성소가 있던 자리와 무함마드가 승천한 자리로 비정된 곳이 동시에 겹쳐 있다는 것입니다. 한 바위 두 신앙. 같은 돌 위에 두 손이 동시에 얹혀 있습니다. 그 한 바위 위에서 11세기 끝자락, 4천 년의 새벽이 가장 큰 폭발음을 냅니다.
9.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와 1096년 라인란트 학살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몽이라는 도시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호소하며 십자군 전쟁이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 군대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도 전인 1096년 봄, 라인강가의 여러 도시에서 끔찍한 일이 터집니다. 십자군 일부가 보름스, 마인츠, 쾰른 등지의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한 것입니다.
왜 성지로 가는 군대가 같은 골목의 유대인을 먼저 죽였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맞물립니다. 770년 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친서가 그어둔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낙인이 그 사이 유럽 골목마다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십자군 일부의 논리는 단순해집니다. "수천 킬로미터 가서 이방의 적을 치러 가는 길에 우리 골목의 그자들은 왜 그대로 두는가?"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얹혔는데, 십자군 행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유대인 가구의 재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군자금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낙인 위에 약탈의 욕망이 같이 얹힌 잔혹한 학살이었습니다. 보름스, 마인츠 같은 도시에서만 약 천여 명, 라인강 도시들을 합쳐 추정치로는 2천 명에서 1만2천 명 사이의 유대인이 죽었습니다. 성지로 가는 길에 가장 가까운 한 골목의 형제들이 먼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10.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회당의 불그리고 1099년 7월 15일, 제1차 십자군이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을 넘습니다. 그 도시의 무슬림들은 알-아크사 모스크 일대에 모여들었고, 유대인들은 그 도시의 한 회당 안에 모여들었습니다. 한 회당 안에 가족 단위로 모여 함께 기도하던 사람들, 어머니, 아이, 노인들... 십자군이 그 회당에 불을 지릅니다. 한 회당 안에 갇힌 한 어머니의 마지막 한 호흡은 어떠했을까요?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날 한 도시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역사가마다 다른 숫자를 적습니다.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아시르는 7만 명이라고 적었지만, 지금은 그 숫자를 과장으로 봅니다. 신중하게 추정하면 수천에서 2만 명 사이의 사람이 그날 그 도시 안에서 죽었습니다.
11. 1187년 살라딘: 88년 만의 다른 선택하지만 역사는 다른 선택을 보여줄 기회도 주었습니다. 88년이 지난 1187년 10월 2일, 같은 도시, 같은 성벽 앞에 한 사람이 섭니다. 살라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다시 손에 넣었는데, 88년 전 십자군이 했던 그대로 갚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살라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도시 안에 남은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몸값을 책정합니다. 성인 남성 10디나르, 여성 5디나르, 어린이 2디나르. 한 사람의 가격이 정해진 협상이었습니다. 도시 안에 몸값을 낼 수 없는 빈민 7천여 명이 남았는데, 그 도시의 기독교 수비대장 반리안이 성 안 금고에서 3만 디나르를 꺼내 그들을 한꺼번에 풀어줍니다. 살라딘은 여기에 더해 노부인 무리를 무료로 풀어주고, 예루살렘의 시라 여왕을 비롯한 귀족 여성들의 몸값도 면제해 주었습니다. 물론 살라딘도 신이 아니었기에, 몸값을 끝내 지불하지 못한 약 1만5천여 명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한 바위 위에서 한 번은 회당이 불탔고, 한 번은 한 가족이 살아 돌아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새벽의 손짓은 1187년 살라딘으로 멈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천 년 동안 그 손짓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12. 추방의 천년: 1290년 영국, 1306년 프랑스, 1492년 알함브라먼저 추방의 천년이 시작됩니다.
두 세기에 걸쳐 유럽의 가장 큰 세 왕국이 같은 결정을 한 것입니다. 명분은 신앙이었지만, 세 왕국 모두 같은 재정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추방은 곧 왕실이 진 채무의 소멸이었고, 유대인 가구의 재산은 그날로 왕의 금고로 넘어갔습니다. 신앙이라는 명분과 빈 금고라는 현실이 같은 손에서 맞물린 결정이었습니다.
13. 1215년 노란 표식이 600년 뒤 가스실 문까지유대인 추방보다 먼저, 그들을 구별하는 한 표식이 있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유대인에게 옷에 구별되는 표식을 붙이라고 의무화합니다. 이 표식은 시간이 지나며 노란색으로 굳어집니다. 그 천 조각 하나가 600년 동안 유럽 도시 골목마다 따라붙다가, 어느 날 가스실 입구의 문 위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6백만 명. 1215년 한 공의회의 한 줄이 730년 뒤 가스실 문앞까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는 한 선 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14. 1896년 헤르츨, 1917년 벨푸어 선언, 1947년 UN 결의 181이 추방의 천년 끝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1896년 2월, 테오도르 헤르츨이라는 오스트리아 기자가 "유대국가"라는 책을 냅니다. 그는 박해받지 않는 우리만의 땅을 갖자, 조상이 살던 그 땅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습니다. 1년 뒤인 1897년 바젤에서 첫 시오니스트 회의가 열립니다. 그리고 20년 뒤인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가 한 통의 편지를 씁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는 데 호의적이다." 이 한 줄이 30년 뒤 한 나라를 만들어냅니다. 1947년 11월 29일, UN이 그 땅을 둘로 나누는 결의 181호를 통과시키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5월 15일, 주변 아랍 국가들이 일제히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15. 1948년 나크바: 530개 마을이 사라진 봄그 전쟁 끝에 그 땅에서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 약 75만 명이 자기 집을 잃고, 마을 530개가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봄을 나크바(Nakba)라고 부릅니다. 한 단어로 옮기면 '대재앙'입니다. 한쪽이 2천 년 만에 자기 집을 되찾은 그 봄이, 다른 한쪽에게는 한 도시 한 도시가 통째로 사라진 그 봄이었던 것입니다.
16. 1967년 6일 전쟁: 통곡의 벽 70세대 만의 회귀그리고 1967년 6월 7일, 6일 전쟁 4일째 되는 날, 이스라엘 군대가 동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군인들이 통곡의 벽 앞에 서서 손을 댑니다. 기원 후 70년 8월 성전이 무너진 뒤 그 외벽이 다시 유대인의 손에 닿기까지 70세대를 기다린 셈입니다. 한 군인이 그 돌에 얼굴을 묻고 우는 사진은 당시의 감격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같은 날, 그 도시의 다른 골목에서는 새로운 점령이 시작됩니다.
17. 1993년 오슬로 협정과 1995년 라빈 암살그래도 한 번은 멈출 뻔했습니다. 1993년 9월, 워싱턴 백악관 잔디밭에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 사이에서 손을 잡습니다. 이른바 오슬로 협정이었습니다. 라빈은 평생 군인이었습니다. 평생 적이라고 배운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아 평화라는 한 줄을 같이 쓴다는 것이 어떤 무게였을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2년 뒤인 1995년 11월 4일, 텔아비브의 한 광장에서 평화 집회가 끝나고 라빈이 차로 걸어가던 중, 한 청년이 등 뒤에서 총을 세 발 쏩니다. 청년의 이름은 이갈 아미르, 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라빈은 그 자리에서 사망합니다. 평생 자기 민족을 지켜온 사람이 자기 민족을 위해 평화 한 줄을 쓰려다 자기 민족 청년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 한 발의 총탄으로 오슬로의 그 평화의 손은 영원히 멈춥니다.
18. 2024년 국제사법재판소 (ICJ): "이스라엘 점령은 불법"그리고 2024년 7월 19일,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ICJ)가 한 줄을 발표합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은 불법이며, 가능한 한 신속히 종료해야 한다." 9월에는 유엔 총회가 같은 내용을 결의로 통과시킵니다. 찬성 124, 반대 14. 이스라엘은 이 결정을 거부합니다.
19. 그 새벽이 오늘 가자에서 아직 멈추지 않는 이유이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면서 한 가지 사실에 한숨이 나왔습니다. 2025년 11월 12일 기준,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상자가 약 24만여 명에 달하며, 가자 면적의 53%에 이스라엘의 통제가 잔존합니다. 4천 년 전 한 새벽에 천막 한쪽이 광야로 향하던 그 손짓이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 새벽에서 회당의 불까지, 회당의 불에서 가스실 문까지, 가스실 문에서 오늘 가자의 한 병원 로비에 무너진 한 어머니의 사진까지 한 번도 끊기지 않은 한 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은 한 도시의 한 골목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가자에서 이스라엘과 이란으로, 이란에서 다시 미국까지, 4천 년 전 한 가족의 한 새벽이 오늘 한 지역 전체에 전쟁이 되어 있습니다. 4천 년 전 그 새벽, 아버지의 한 손이 한 아들을 광야로 보낸 그 손짓이 오늘 가자의 폐허에서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남이 싸우는 것보다 형제가 싸우는 게 더 아프고 더 잔인한 법입니다. 이건 그들의 굴레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굴레입니다. 한 줄의 낙인이 한 권력의 친서를 만나고, 한 세대의 분노가 다음 세대의 칼이 되는 그 패턴은 4천 년 전 그 천막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같은 핏줄이 한 번 갈라지면 가장 가까운 거리가 가장 먼 거리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영상은 이러한 스토리를 가장 잘 묘사한 콘텐츠입니다. 한번 보시면 이해하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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