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란(과거 페르시아)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복잡하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변화했습니다. 과거에는 협력 관계였으나 현재 원수가 된 배경에는 시대적 이벤트와 역사적 사건들이 얽혀 있습니다. 
1. 이란-이스라엘 관계의 뿌리 (아브라함으로부터의 배경과 아랍-이스라엘 갈등의 토대)- 아브라함으로부터의 뿌리 (배다른 형제 관계):
기원전 2100년경,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하갈의 후손, 아랍인의 조상)과 이삭(사라의 후손, 유대인의 조상)은 유대인과 아랍인이 '배다른 형제'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종교만 다를 뿐, 근원적인 혈연적 유대가 있음을 시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깊어진 배경을 설명합니다. 
- 유대인의 고난과 2천 년간의 유랑:
- 이집트 노예 생활과 모세의 출애굽, 로마 제국의 박해(서기 68년)와 '디아스포라(Diaspora)'로 인한 2천 년간의 유랑은 유대인들이 고향 없는 민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고난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유럽에서의 박해는 시오니즘 운동의 동기가 됩니다.
- 시오니즘 운동의 태동 (드레퓌스 사건):
- 영국의 이중 계약과 갈등 심화:
-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독립 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후세인-맥마흔 협정을 맺으면서도, 동시에 유대 자본과의 거래를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만들어주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합니다. 이 이중 계약은 아랍인들이 '영국에 사기당했다'고 느끼게 만들었고, 팔레스타인 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 이스라엘 건국의 결정적 계기 (UN 분할안):
- 유대인들의 테러와 영국의 철수 이후, 1947년 유엔(UN)은 당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85%를 차지하던 아랍인과 5%에 불과하던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거의 반반으로 나누는 분할안을 결의합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재앙(Nakba)'으로 받아들여졌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 중동 전쟁과 팔레스타인의 고립:
1차, 2차, 3차 중동 전쟁을 거치며 이스라엘은 UN 분할안보다 훨씬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좁은 지역으로 밀어냅니다. 1978년 이집트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아랍의 맹주였던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고 수교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이집트를 아랍 세계의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아랍 진영 내에서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2. 팔레비 왕조 시절 (친선 협력 관계): 이란과 이스라엘의 ‘밀월 시대’위의 배경들이 아랍 세계 전체의 반(反)이스라엘 정서를 형성했지만, 이란은 이슬람 혁명 이전까지는 오히려 이스라엘과 매우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팔레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샤는 친서방 정책을 추구했으며, 이는 이스라엘과의 협력으로 이어졌습니다. - 배경 및 공통의 이해관계:
- 구체적인 협력 내용:
- 외교 관계: 1950년 이란은 이스라엘을 사실상 인정했으며, 1960년대 초에는 테헤란에 이스라엘 대표부가 설치되고 실질적인 외교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 정보 및 안보 협력: 이란의 정보기관 사바크(SAVAK)와 이스라엘의 모사드(Mossad)는 긴밀하게 협력하며 정보 교환 및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아랍 국가들의 동향에 대한 정보 공유가 활발했습니다.
- 경제 및 무역: 이란은 이스라엘에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주요 국가 중 하나였고, 이스라엘은 이란에 농업 기술, 군사 장비, 건축 기술 등을 제공했습니다. 양국 간의 무역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 군사 협력: 이스라엘은 이란 군대의 훈련을 돕고 일부 군사 장비 및 기술을 지원했습니다. 양국은 유사시 상호 지원 방안까지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과 이스라엘은 중동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전략적 파트너였으며, 앙숙과는 거리가 먼 밀월 관계였습니다. 3. 이스라엘과 이란이 결정적으로 원수가 되는 계기: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180도 뒤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입니다. 팔레비 샤 정권이 무너지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이란의 외교 정책은 근본적으로 변화했습니다. - 이념적 변화:
- 정책적 변화:
- 외교 관계 단절: 혁명 직후 이란은 이스라엘과의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이스라엘 대사관을 폐쇄한 후, 그 자리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대표부를 개설했습니다.
- 하마스 및 헤즈볼라 지원: 이란은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와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단체 헤즈볼라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단체는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작용했습니다.
- 핵 프로그램: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이스라엘에게는 존재론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는 양국 관계의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핵심 요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보유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예방적 공격 가능성까지 시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란(과거 페르시아)과 이스라엘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기점으로 친선 협력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원수 관계로 전환되었습니다. 팔레비 왕조 시절에는 양국이 아랍 민족주의와 소련의 위협에 맞서는 공통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긴밀히 협력했으나, 혁명 이후 이란의 새로운 이슬람 이념은 이스라엘을 서구 제국주의의 하수인이자 팔레스타인 무슬림을 억압하는 '사탄'으로 규정하고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하며 적극적인 대결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여기에 이란의 핵 프로그램과 지역 내 패권 경쟁이 더해지면서 현재의 깊은 적대 관계가 고착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