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정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명성황후의 일대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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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여흥민씨 가문 민자영 1851년 11월 17일 출생 ~ 1895년 10월 8일 사망(추정)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 섬락리에서 출생 숙종의 계비 인현황후는 그녀의 5대 고모뻘 1866년 3월 20일 재위
명성황후 민씨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의 왕비이자 책봉황후.
왼쪽부터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고종
당시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정치의 혼란시기에 많은 탐관오리들이 민심을 바라보지 않고 잇속을 챙기기에 집중했던 듯 함.
아래는매천야록및 민서에 쓰여진 문구 일부
당시 조선을 바꾸려고 하는 정치세력은 2개의 파벌로 나뉘어졌었음.
급진개화파는 친일파로 명성황후가 눈의 가시였을 것으로 판단 됨.
급진개화파는 명성황후와 다른 시각으로 정치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와의 외교관계 발전을 추진하고 있었다고 함.
을미사변-1895년 8월에 당시 경복궁을 침탈한 무리들이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시해한 사건.
아래는 명성황후의 사진과 당시 신문 기사
에조보고서에는 “황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황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황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스에마쓰 장관님, 정말로 이것을 글로쓰기는 괴로우나 건청궁 옥호루에서 민비를 시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대해 보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민비는 강제로 저고리가 벗겨져 가슴이 훤히 드러난상태로 머리채를 잡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낭인 하나가 거센 발길로 민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자 또 하나의 낭인이 민비의 가슴을 칼로 베었습니다. 일은 그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왕세자(순종)를 불러 쓰러져 있는 여인이 민비임을 확인한 낭인들은 모두 민비의 주위에 몰려 들었습니다. 왕비를 시해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조선 제일의 미녀를 앞에 두어서였는지.. 그들은 조선의 가장 고귀한 여인을 앞에 두고 갑자기 숙연해졌습니다. . 낭인들은 민비의 하의를 모두 벗겼습니다. 한 낭인이 발가벗겨져 나체인 국모의 다리를 벌렸고 약 20명이나 되는 낭인들은 모두 바지를 내린후 성기를 꺼내 쫙 벌어진 명성황후의 음부(陰部)에 대고 ... 정액으로 얼룩진 조선 왕비를 앞에 놓고... 그리고 이들은 명성왕후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한명 씩 돌아가며 칼로 이마에 십자로 그은 후 곧바로 얼굴부터 발끝까지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칼로 난도질하여 차마 볼수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훼손되었으며 마지막 낭인이 명성왕후의 국부(局部)(국모의 음부를 높여 부르는 말)에 대검을 꽃아놓은후 낭인들은 대일본 만세를 불렀습니다. 낭인들은 시신을 증거를 없애기 위해 명성왕후 침실에서 멀리 떠러진 녹산 남쪽 숲속에서 기름을 부어 불태워 버렸읍니다.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지만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했으며 히젠도란 대검이 국모의 국부에서 가슴부까지 관통할때 내장및 장기가 파열되 마지막 숨이 끊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우사냥이란 글씨 그대로 국모를 사람이 아닌 여우란 짐승으로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기에 살아생전 그렇게 도도하고 당당했던 했던 여우는 죽을때도 도도하고 당당하게 죽나 보자는 식으로 히젠도가 국부에서 가슴부까지 관통할때 비명과 고통의 신음을 내며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임,
놀라운건 우리가 씨없는 수박을 만들어내 존경하고 있는 우장춘 박사가 사실은 명성황후 시해 주범 중 하나였던 우범선의 아들이었다는 것
아래는 외국 기자가 당시 사건을 기사화 한 것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및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 무리들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깊숙이 들어가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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