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방관의 죽음'과 조선일보의 패륜

31395 
Created at 2007-01-02 07:24:09 
328   0   0   0  

조선일보가 2006년 11월 16일 사설 한편을 쏴 올렸다. 제하여 <한 소방관의 죽음>. 타이틀 그대로 11월 15일 부산 금정구 가스폭발 현장에서 이미 두 명을 구하고도 한 명이라도 더 구하고자 마지막 수색을 하다가 붕괴된 건물에 매몰돼 유명을 달리한 고 서병길 소방장의 의로운 주검을 기리는 사설이다.

'한 소방관의 죽음'과 조선일보의 패륜
▲ 조선일보 2006년 11월16일자 사설  
 
추모사설답게 시작은 사뭇 숙연하고 비장하다. 조선일보는 사설 전반부를 할애해 화재현장에서 숨진 그가 올 12월 정년퇴임하게 돼 있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전한다. 한 달 보름만 지나면 화재현장을 떠나 사랑하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 손주 재롱을 보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그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겠다"며 금방 무너질 건물로 들어가 기어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야 말았다는 휴먼스토리는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적시기에 충분하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우리 사회를 받치고 있는 기둥은 바로 서 소방장 같은 직업, 서 소방장 같은 사람들이다"는 말로 전반부를 매듭지은 사설은 후반부 들어 갑작스레 방향을 선회한다. 노무현 정부가 통치하는 대한민국을 성토하고 비난하는 분위기로.
 
이 나라를 깎아내리기 위해 조선일보가 먼저 들고 나온 것은 "9·11 테러로 화염에 싸인 뉴욕 쌍둥이빌딩에 진입해 숨진 343명의 소방관"이다. 사설은 순직한 이들 소방관들을 기리는 미국 정부의 감동적인 행위를 집중 조명한다.
 
"이들의 장례식은 전 미국에 TV로 생중계됐으며, 전 미국 국민은 이들에게 바치는 조사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으로 따라가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이들에겐 평균 40억원씩 보상금이 주어졌다. 그런 정부의 보답, 그런 사회의 감사가 있기에 소방관들은 불길 앞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시민들을 구하고 자기 몸을 대신 사르는 것이다...."
 
별다른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 부분을 부러 발췌하여 소개하는 까닭인즉, 조선일보가 전달하고자 하는 사설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이것이 치명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눈 밝은 이들은 이미 눈치채셨을 게다. 그 다음에 어떤 장면이 펼쳐질 것인지....
 
"우리는 5년 전 서울 홍제동에서 순직한 소방관들을 기리는 서부소방서 기념비가 유일한 기념물이다. 그것도 유족들이 사비를 모아 세웠다고 한다. 서해교전 때 숨진 장병들의 장례식에 끝내 정부 고위인사들이 얼굴을 비치지 않은 곳이 이 나라다. 서해교전 유가족이 '나라 위해 간 분을 홀대하는 썩은 나라'라며 이민 가는 일이 벌어진 곳도 이 나라다...."
 
그렇다. 사설은 미국에서 벌어진 감동적인 장면을 중계한 다음에, 곧바로 화면을 바꿔 이 땅에서 벌어진 '볼품없는' 광경들을 내보낸다. 전 미국에 TV로 생중계됐다는 미 소방관들의 거창한 장례식과 서해교전 장병들의 초라한 장례식을 오버랩시키고, 유족들이 사비를 모아 세웠다는 서부소방서 기념비와 평균 40억원씩의 보상금을 교묘하게 중첩시키는 편집솜씨를 보라. 가히 예술 아닌가
 
이처럼 미국과 한국의 '극과극'을 대비시키려는 마음이 앞서다 보니, 조선일보는 5년전 소방관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홍제동 방화사건에다 서해교전 때 숨진 장병들의 장례식까지 한 카테고리에 억지로 끼워넣는 논리적 탈선도 과감히 자행한다. 현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불만을 선동하기 위해선 못 할 게 없다는 투다.
 
전개가 이럴진대 결론 역시 뻔하다. "제대로 된 정부와 사회는 이런 직업과 이런 사람의 죽음에 제 의미와 제 값을 매길 줄 안다...." 운운. 이 말 자체는 시비할 것이 없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 하나. 말 그대로, 우리나라에 언제 '제대로 된 정부'가 들어선 적이 있었나? '각자에게 제 몫이 돌아가는' 정의로운 사회를 우리가 누려 본 적이라도 있었던가 말이다

아다시피 소방관에 대한 불량한 처우는 비단 이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일보가 경외하는 박정희·전두환 공포시절엔 이보다 훨씬 더 극악했다. 그때라고 소방관들의 억울한 죽음이 없었을까. 그러나 그 시절 조선일보는 무엇하고 있었나? 그때부터 입바른 소리를 했다면, 그래서 아젠다를 선점하고 여론을 불지피는 막강한 영향력으로 소방관에 대한 처우개선을 진즉부터 노래했다면, 지금 이 지경은 안 됐을 것 아닌가.
 
소방관의 죽음에 뜬금없이 끼워넣은 서해교전 장병의 장례식 얘기는 악의적인 글쓰기의 극치다. 논리 오류는 차치하고라도,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장병의 목숨값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전임 정부를 비난하면서, 이제껏 해결되지 않고 있는 북파공작원 얘기는 왜 빼놓나? 조선일보에겐 서해교전에서 숨진 장병들만 중요하고, 이름 없이 죽어간 북파공작원들은 눈에 뵈지도 않는가?
 
순직 소방관을 추모하는 척 하면서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선동하는 조선일보 사설의 악랄함을 지적하자면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이쯤해서 마감하련다. 스크롤 압박의 부담을 지우는 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글을 끝내기 전에 조선일보에게 이 말만은 꼭 해야 겠다.
 
"정부 비난하자고 한 소방관의 의로운 죽음까지 이용하는 패륜적 작태를 언제까지 계속 할 셈인가? 조선일보는 정녕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고 서병길 소방장의 의로운 주검을 슬퍼하며, 유족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문한별 / 언론인권센터 대외협력위원장



Tags: 언론비리 언론폭력 조선일보 Share on Facebook Share on X

◀ PREVIOUS
악마와의 거래
▶ NEXT
의미 있는 일
  댓글 0
로그인을 하시면 댓글을 등록 할 수 있습니다.
SIMILAR POSTS

조중동을 무시하다니... 이 양반이야말로 용자다...! (created at 2008-06-02)

1936년 조선일보 신년사 - 지금 보니 눈에 거슬리는 신년사 (created at 2011-12-29)

1920년대 일제에 대한 조선의 항일 저항운동 (updated at 2023-11-13)

조선일보를 안본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이유 - 천황폐하, 전두환 각하, 김일성 장군 만세? (created at 2024-03-07)

OTHER POSTS IN THE SAME CATEGORY

헤어진다는 것 (created at 2007-01-05)

거절 (created at 2007-01-05)

새롭게 태어난 수퍼맨의 굴욕 (created at 2007-01-05)

피식 자료 모음 (created at 2007-01-04)

바비인형의 목이 중요한 이유 (created at 2007-01-04)

김선아 싸인회때 절묘한 순간컷 (created at 2007-01-04)

충격의 겨털사건 (created at 2007-01-04)

네이버를 네이버로 읽지 않기 서명운동!? (created at 2007-01-04)

'ㅇ' 발음 안되는 아유미와 퀴즈 (created at 2007-01-04)

슬림 휴대폰의 비애 (created at 2007-01-04)

맞선 (created at 2007-01-04)

일본 기상 방송 (created at 2007-01-03)

으어니 !! 이건 어떤 !? (created at 2007-01-03)

자신감을 보이는 조성모.. (created at 2007-01-03)

의미 있는 일 (created at 2007-01-03)

악마와의 거래 (created at 2007-01-01)

연예인 살빼기 전후에 대한 의혹 (created at 2006-12-31)

국회의원들 병역 현황 (created at 2006-12-29)

웹 검색계 1년을 되돌아 보며,「구글의 빛과 그림자」 (created at 2006-12-29)

된장녀가 증말 있긴 있나부네 (created at 2006-12-29)

섹시해서 믿는거 아녀? ㅎㅎ (created at 2006-12-29)

넘어지기의 대가 (created at 2006-12-29)

직장인 공감 (created at 2006-12-29)

결코 평범하지 않은 카드 (created at 2006-12-29)

나비효과 (created at 2006-12-29)

예술 (created at 2006-12-20)

2006년 황당/엽기 사건 베스트11 (created at 2006-12-20)

삼촌의 굴욕 (created at 2006-12-16)

생활의 발견 (created at 2006-12-16)

코스프레 빈부 격차! (created at 2006-12-16)

UPDATES

소녀대 - Bye Bye Girl (updated at 2024-04-13)

대한민국 날씨 근황 (created at 2024-04-13)

성일종 인재육성 강조하며 이토 히로부미 언급 - 인재 키운 선례? (updated at 2024-04-13)

일제강점기가 더 살기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조수연 국민의힘 후보 - 친일파? (updated at 2024-04-13)

Marshall Ha님의 샤오미 SU7 시승기 -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님이 긴장할만한 느낌 (updated at 2024-04-09)

윙크하는 귀염둥이 반려견들 (created at 2024-04-08)

달콤 살벌한 고백 (created at 2024-04-08)

북한 최정예 공수부대 훈련 모습 (updated at 2024-04-02)

맛있었던 친구 어머니의 주먹밥이 먹고 싶어요 (created at 2024-04-02)

자리 마음에 안든다고 6급 공무원 패는 농협 조합장 (created at 2024-03-26)

85세 딸 짜장면 사주는 102세 어머니 (created at 2024-03-26)

1990년대 감각파 도둑 (created at 2024-03-26)

치매에 걸린 69살의 브루스 윌리스가 전부인 데미무어를 보고 한 말 (updated at 2024-03-22)

경제는 대통령이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라던 윤석열대통령 - 상황 안좋아지자 여러 전략을 펼쳤지만, 부작용 속출했던 2024년의 봄 (updated at 2024-03-13)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필요성을 못느낀다는 윤석열 대통령 (updated at 2024-03-08)

조선일보를 안본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이유 - 천황폐하, 전두환 각하, 김일성 장군 만세? (created at 2024-03-07)

광폭타이어를 장착하면 성능이 좋아질거라는 착각 (updated at 2024-03-03)

면허시험장에서 면허갱신하면 하루만에 끝나나? (updated at 2024-03-03)

신한은행/신한투자증권 금융거래 종합보고서 다운로드 방법 (updated at 2024-02-26)

100년 된 일본 장난감 회사가 내놓은 변신 기술에 난리난 과학계 (created at 2024-02-26)

알리에서 발견한 한글 지원하는 가성비 쩌는 무선 기계식키보드 (updated at 2024-02-25)

쌍팔년도가 1988년인줄 알았던 1인 (updated at 2024-02-23)

이쁜 색으로 변신한 테슬라 사이버트럭 (created at 2024-02-23)

2024년 카타르 아시안컵 4강전 전날 한국 대표팀 내부에 있었던 이강인의 폭주 (updated at 2024-02-21)

강릉 맛집 지도 (updated at 2024-02-20)

간이 안좋을 때 나타나는 증상 20가지 (updated at 2024-02-20)

배설물을 이용하여 일본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 조명하 (updated at 2024-02-20)

요건 몰랐지롱? 이순신을 사랑한 외국인 (created at 2024-02-20)

원빈도 머리빨 (created at 2024-02-19)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미남배우 중 하나인 원빈 (created at 2024-02-19)

백제의 건국 시조 온조왕 (updated at 2024-02-19)

700년동안 대한민국 고대국가의 한축이었던 백제시대 (created at 2024-02-19)

대머리들에게 주는 대머리의 조언 (created at 2024-02-17)

일본의 여성 락그룹 프린세스 프린세스의 "다이아몬드" (created at 2024-02-17)

결혼식 직전 연락두절된 신랑 (created at 2024-02-17)

대한민국 축구팀 파문으로 인해 중국 소셜미디어까지 등장한 탁구 전도사 이강인 (updated at 2024-02-16)

조국의 반격으로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한국의 정치판 - 데뷰와 동시에 한동훈 장관에게 던진 4개의 질문 (updated at 2024-02-15)

2024년 카타르 아시안컵 4강전 전날 내분사태로 갑자기 회자되는 이승우선수의 친화력 (created at 2024-02-15)

카카오뱅크 금융거래종합보고서/잔액증명서/거래내역서 발급 방법 (created at 2024-02-14)

아이가 최고의 스승이었다 (created at 2024-02-13)

이제는 국민 유행어로 등극한 한동훈의 "싫으면 시집가" (updated at 2024-02-13)

설 연휴 잔소리 메뉴판 - 이제 잔소리 하기전에 요금부터... (updated at 2024-02-10)

로버트 드니로의 70년 전 모습 (created at 2024-02-08)

카메라 어플로 만들어본 슈퍼걸 - 엄... 최종 작품은 왠지... (created at 2024-02-08)

앞트임 하고 새롭게 태어난 대한민국의 젊은 용사 (created at 2024-02-08)

비가 억수로 내리던 2024년의 2월 어느날 캘리포니아의 밤 카니예 웨스트와 그의 아나 비앙카 센소리 (updated at 2024-02-08)

스케방형사 1화 - 수수께끼의 전학소녀사키 (created at 2024-02-05)

백제와 일본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근초고왕 시대 (created at 2024-02-05)

일에 찌들은 아빠가 꿈에서 깨어나지 않자 구출해주는 짱구 (created at 2024-02-03)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휴 그랜트(Hugh Grant)가 블랙핑크 콘서트에 다녀온 후 소감 (created at 2024-02-03)